2022. 1. 14. 19:08ㆍ고전 읽기
작가 현기영의 소설 <순이 삼촌>을 이제야 읽었습니다. 1979년에 나온 소설입니다. 아마 작품 구상을 하고 쓴 것은 그보다 훨씬 이전이 아닐까 싶습니다. 서랍 속에 오래 묵혀 두었다가 박정희 유신독재 말기에야 조심스레 내놓은 소설 같습니다. 권위주의 독재 시절 누가 감히 제주 4.3의 참상을 공공연히 증언할 수 있었겠습니까?
아무리 유신 말기라지만 작가로서는 제주 4.3의 민간인 학살을 다룬다는 사실만으로도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였을 겁니다. 지금 읽어 보면 표현상 시대적 한계가 뚜렷합니다. 가령 좌익 무장대를 가리켜 '빨갱이,' '폭도,' '공비' 따위의 단어들을 사용합니다. 제주 도민의 민중봉기를 '반란,' 또는 '폭동'이라 규정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소설은 무고한 민간인 대량학살과 살아남은 사람들의 후유 장애를 잘 묘사해 냅니다.
소설 <순이 삼촌>은 제주 4.3의 아픔을 널리 알리는데 상당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제주에 가서 그 아름다운 풍광만 즐기다 가는 사람은 제주의 진면목을 모릅니다. 왜 제주에는 남자들이 그리 부족하였는지 알지 못합니다. 사투리도 전국에서 가장 독특하여 다른 지방 사람들이 쉽게 알아듣지 못하니 더 그럴 겁니다.
제주 출신 현기영 작가는 제주가 겪은 4.3의 참상을 과감히 작품에 담아냈습니다. 제주 4.3 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도록 눈앞에 보여주듯 형상화하였습니다.
작품에 등장하는 '순이 삼촌'은 주인공 '나'(상수)의 먼 친척뻘 아주머니입니다. 그런 사람을 남녀 구분 없이 '삼촌'이라 부르는 제주 관습 때문에 '순이 삼촌'이라 한 거였습니다. 화자 '나'는 제주 출신으로서 서울에 나가 대기업 중역이 되어 산 지 8년이 되었고 끔찍한 기억을 잊고자 그동안 고향을 한 번도 찾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할아버지 제사가 있어 오랜만에 고향을 찾아가 '순이 삼촌'이 '객사'하였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순이 삼촌은 사망하기 두 달 전까지 약 1년 간 '나'의 집에서 가사도우미로 일하였습니다. 그 사이 4.3 학살 후유증으로 얻은 신경쇠약에 따른 잦은 환청으로 주인공 '나'의 아내와 몇 차례 갈등을 빚었습니다. 그런 다음 돌연 고향으로 되돌아갔는데 자신의 옴팡밭에서 독약을 먹고 쓸쓸히 목숨을 끊었습니다.
순이 삼촌의 '옴팡밭'은 제주 4.3 민간인 학살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장소입니다. 삼십 년 전 군경 토벌대는 마을 사람들을 초등학교에 다 모이게 해 놓고 군경 가족과 친척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을 모두 끌고 가 학살하였습니다. 그 학살 터 중 한 곳이 숨이 삼촌이 일구던 '옴팡밭'이었습니다. 순이 삼촌은 산더미처럼 쌓인 그 시신더미에서 용케도 살아남아 그 끔찍한 밭을 일구고 살아갑니다.
밭에서는 사람 뼈다귀, 탄피 따위가 계속 나왔고 이듬해 심은 감자는 누구도 먹지 않으려 하였습니다. 순이 삼촌은 마치 운명처럼 묶인 옴팡밭을 떠나지 못한 채 과부로 삼십 년을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탈출하듯 서울 상수(나) 집의 가사도우미를 자처해 간 거였습니다.
하지만 학살 후유증은 그곳까지 따라왔습니다. 순이 삼촌은 삼십 년 세월이 흘렀는데도 끝내 학살 피해망상을 떨치지 못한 채 그 옴팡밭에 돌아가 자결하고 맙니다. 작가는 이런 순이 삼촌과 옴팡밭으로 제주 4.3 학살 피해자들의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려한 것 같습니다.
<순이 삼촌>을 읽기 전만 해도 책 전체가 이 한 편의 소설로 구성되어 있는 줄 알았습니다. 읽다 보니 중단편 소설을 엮은 책이었습니다. 소설 '순이 삼촌'은 두 번째 소설로 나오는데 56쪽 분량 밖에 안 됩니다. 한두 시간이면 충분히 읽을 수 있는 중편 소설입니다. 하지만 다름 아닌 4.3 당시 민간인 학살을 주요 소재로 하기에 그리 술술 넘어가지는 않습니다. 그냥 곧바로 읽어도 되겠지만, 가급적 관련 배경 지식 습득하고 읽는 게 더 좋을 듯합니다.
현기영 작가는 글을 마치 리듬 지닌 문장처럼 매끄럽게 다듬어 씁니다. 비록 아직 두 편의 소설 밖에 읽지 않았지만 제가 보기에 그렇습니다. 소설을 완성해 내놓기까지 한 문장 한 문장 오랜 시간 세공한 흔적이 보입니다. 정확하고 풍성한 표현을 해내 독자에게 읽는 맛을 안겨 줍니다. 똑같은 장면이라도 누가, 어떻게 묘사하느냐가 그래서 중요하나 봅니다.
사실 제주 4.3 항쟁기 동안 도민들이 겪은 엄청난 고통, 상처, 그리고 후유 장애까지 그 누가 깊이 알고 생생히 공감할 수 있겠습니까? 실제 겪어 본 사람이 아니고는 아무래도 감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 현 작가는 1941년생이고 제주 출신이라 자신이 어린시절 직접 본 것, 어른들에게 들은 것, 알게 된 것들을 바탕으로 이 같은 소설을 쓴 걸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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