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의 '치하포 사건' <백범일지>와 신문조서 차이 크다

2023. 2. 24. 14:59고전 읽기

 

1896년 3월 발생한 일본인 쓰치다 타살 사건인 '치하포 사건'이 <백범일지>와 신문조서, 관련 공문 등과 대조하였을 때 차이가 크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하지만 백범 김구 관련 각종 다큐나 영화, 대중 강연에서는 이 같은 사실을 두루 확인하지 않고 <백범일지> 내용을 확대 재생산하고 있어 바로 잡을 필요가 있다.
 
치하포 사건은 1896년 3월 9일 새벽 3시경 대동강 하류에 있는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의 어느 주막에서 청년 김창수(21세, 훗날 김구로 개명)가 일본인 쓰치다 죠스케(土田讓亮)를 살해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김창수는 생애 처음으로 투옥됐고 탈옥한 뒤 잠시 승려 생활 등을 하다가 중국에 건너가 임시정부에서 활동한다. 백범 김구는 자신의 회고록 <백범일지>에서 '치하포 사건'을 매우 비중 있게 다룬다. 그 정도로 인생을 결정지은 중대한 사건으로 여긴다.
 

AI로 그린 치하포 사건 당시 장면 상상도


김구가 <백범일지>에서 말하는 치하포 사건을 요약하면 이렇다. 당시 김창수는 평양에 갔다가 단발령에 대한 백성들의 원성과 반발이 거셈을 보았다. 처음에는 청나라로 건너가려다가 어수선한 국내 사태를 지켜보고자 귀가하던 중 치하포 주막에 들렀다. 그는 거기서 단발머리에 두루마기를 입고 그 속에 칼을 찬 한 일본인을 발견하였다. 김창수는 이 일본인을 얼마 전 경성에서 민비 시해를 주도한 삼포오루(조선 주재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이거나 그의 공범으로 단정하였다. 그리하여 국모를 죽인 원수를 갚고자 발길로 차 쓰러뜨린 뒤 달려가서 그자의 칼을 빼앗아 살해하였다.
 
죽은 일본인의 소지품을 뒤져보니 그는 '일본 육군 중위' 토전양량(土田讓亮)이었고 엽전 8백 냥을 지니고 있었다. 김창수는 주막 주인 이화보에게 시신은 바닷속에 던져 물고기 밥이 되게 하고 8백 냥은 뱃삯 일부를 계산한 뒤 동네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 주라고 하였다. 또한 "국모원수를 갚고자 이 왜놈을 죽이노라. 해주 백운방 김창수"라는 글을 써서 통로 벽에 붙였다. 그런 다음 "사건 경과를 안악군수에게 알리라"고 주막 주인 이화보에게 지시한 뒤 그 일본인의 칼을 갖고 걸어서 집으로 돌아갔다.

 

 치하포 사건 관련 기록 치하포 사건 관련 연구 논문과 당시 해주부의 보고서 ⓒ 정병진

 
 
그러면 피고 김창수의 신문조서와 당시 공문들은 '치하포 사건'을 어떻게 기록할까? 현재 남아 있는 관련 신문조서는 해주부의 기록, 인천재판소의 죄인 김창수 초초(初招), 재초(再招), 삼초(三招) 조서, 치하포 점주 이화보(48세)에 대한 초초(初招), 재초(再招) 조서이다. 그 밖에 김창수 본인의 진술서와 조선 정부에 사건 처리를 독촉하는 일본측 공문들, 해주 관찰사가 내무대신에게 사건을 보고한 공문들, 서재필의 <독립신문>과 일본 <아사히신문> 보도 등의 관련 기록이 있다.
 
이 같은 관련 기록들에서는 김창수가 일본인 쓰치다를 살해한 동기를 '국모의 원수를 갚고자' 행한 것이라 보지 않는다. "국모의 원수를 갚고자 거사를 행했다"는 진술은 삼초 때(1896. 9. 10)에야 처음으로 한 차례 나온다. 김효익(해주부관찰사서리)이 외부대신 이완용에게 1896년 6월 28일 보고한 공문에는 김창수의 진술서가 첨부돼 있다. 여기서 그는 계사년(1893년)에 동학교도가 되어 "팔봉접주(八峯接主)"라 칭하면서 "도처에서 노략질(到處行掠)을 하였다"고 말한다. 가령 12월에 문화군 동산평에서 일본인이 쌓아둔 쌀 150석을 탈취한 적 있고, 돈 250냥을 토색(討索: 돈이나 물건을 강제로 빼앗음)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치하포 사건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 없으니 잘 살펴서 처리해 달라"(鴟河浦事에 至하야는 果時全然不知하오니, 相考處之하여 주옵소서)고 진술한다. "국모 원수를 갚고자 왜놈을 죽였다"는 글을 자신 이름까지 밝히며 붙였다던 <백범일지> 내용과 달리 살해 혐의 자체를 부인한 것이다.
 
김창수는 8월 31일 첫 번째 조서에 이르러서야 자신의 살인 혐의를 인정한다. 그는 살인 동기를 "단발하고 칼을 찬 수상한 사람이 밥을 요구하자, 주막 여점원이 노소(老小) 분별도 없이 그에게 먼저 밥상을 주기에 분개하여 그자를 발로 차서 죽이고 그 시신을 얼음 언 강에 버렸다"고 밝힌다. 두 번째 신문(9월 5일)에서 경무관 김순근은 "너는 일본인을 죽인 뒤 의병이라 자칭하고 일본인 배의 금품을 탈취하였으니 그 재물이 탐나서 일본인을 죽인 것이냐?"고 묻는다. 이에 죄인 김창수는 "일본인을 죽인 뒤에야 그의 배에 돈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며 금품 탈취 목적이 아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일본인 쓰치다의 돈의 전액은 "대략 엽전 백 냥"이고 그 돈으로 "동행인 노자로 얼마를 주고 75냥으로는 나귀 한 마리를 사서 타고 왔다"며 금품 탈취 사실 자체는 인정한다. 세 번째 조서 기록을 보면 이때(9월 10일)는 판사 이재정과 일본경사관 경부 신곡청이 함께 신문하였다. 두 사람 중 누구인지는 알 수 없지만, 취조자는 "무슨 불협(不協)한 마음이 있어서 이토록 인명을 상하였느냐?"고 묻는다. 이에 김창수는 "국민된 몸으로써 국모의 원수를 갚고자 원한을 품었으므로 이 거사를 행한 것"이라 한다. 해주부와 인천항재판소의 취조까지 네 차례 신문 중에 "국모의 복수를 위해 거사한 것"이란 진술은 3차 조서 기록이 유일하다.
 
김창수는 1, 2차 취조에서는 "돌과 몽둥이를 이용해" 홀로 저지른 범행이라 한다. 반면 3차 때는 "자신과 동행한 세 사람(1차 취조 때 '평양 사람 정일명, 함경도 정편 사람 김장손, 김치형'이라고 동행한 세 명의 실명을 밝혔음)과 여러 행인이 합세하여 타살하였다"고 말한다. "왜 말이 바뀌었느냐?"고 추궁하자, 자신이 "먼저 일을 저지르고 나중에 여러 사람이 합세한 것이라 다른 사람들을 끌어 들인 결과가 되었다"며 "여럿이 함께 살해 모의를 하진 않았다"고 말한다. 주막 주인 이화보의 조서를 살펴보면 쓰치다 살해는 김창수 혼자 저지른 게 아니다. 그와 함께 온 3명이 합세해 함께 살해하였다.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자신이 치하포에서 살해한 일본인 신분을 "일본 육군 중위"라 하였다. 그러나 그의 진술서, 조서 내용, 이 사건을 보도한 <독립신문>과 <아사히 신문> 기사 등 그 어디에서도 살해당한 일본인 쓰치다가 '일본 육군 중위'란 사실은 나오지 않는다. 그는 나가사키(長崎)현 쓰시마(對馬島) 출신의 매약(賣藥) 상인, 곧 서양에서 들어온 약을 팔러 다니던 약 장수였다. 이 같은 사실은 관련 기록들에서 일치한다. 쓰치다는 배 한 척을 빌려 조선인 임학길(20세, 평안도 용강 사람)을 통역으로 데리고 황주에서 인천으로 돌아가다가 이 같은 변을 당하였다.
 
일본정부는 아관파천 이후 발생한 일본인 피해에 대한 배상을 조선 정부에 집요하게 요구하였다. 일본 관리공사 소촌(小村, 고무라 주타로)이 1896년 5월 30일 조선 정부 외무대신에게 보낸 기밀문서(我國人民 피해에 관한 件) 의하면 을미사변(2월 11일) 전후 공문 발송일까지 발생한 일본인 피살해자는 43명, 부상 및 피해자는 19명에 달한다. 일본 정부는 이들의 "생명 및 신체의 손해보상금액을 14만 6,000圓으로 산출"하여 그 배상금을 요구하였다. 조선 정부는 그 지불을 계속 미루다가 10년 만인 1905년 3월에 이르러 고종의 '내탕금'(고종의 개인 정치자금)으로 누적 청구액 25%를 감한 18만 3,750원의 배상금을 지불하였다. 쓰치다 죠스케의 유족은 세금 등을 제한 3,778원 59전의 배상금을 받았다. 1896년 당시 대한제국 군부의 예산은 1백만여 원, 경무청이 17만여 원이었다. 이런 사실을 생각할 때 일본 정부가 요구한 배상금 액수가 얼마나 터무니없는 거액이었는지 알 수 있다.
 
한편 치하포 사건 당시 김창수가 살해한 일본인이 '일본 육군 중위'가 아니란 사실은 '백범 김구' 연구자로 널리 알려진 도진순 교수(창원대 역사학), 양윤모 박사(역사학), 배경식 선생(역사문제연구소 부소장), 김상구 선생(재야 역사학자) 등이 저서와 논문에서 꾸준히 제기하여 학계에서는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일반인들은 80종 이상에 달하는 <백범일지>나 영화 <대장 김창수>(2017), KBS 다큐 <백범 김구>(2012), 설민석 같은 스타 강사들의 백범 김구 관련 강연을 주로 접하고 있어 사실 관계를 오해할 위험이 큰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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