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1. 21. 16:19ㆍ책 읽기
정연복의 『아름다운 사람 아름다운 신 예수』와 다시 만난 인간 예수

교회에 갇힌 예수, 길을 잃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수를 평생의 삶의 표상으로 삼아야 한다. 그리스도인 됨이란 곧 예수를 따르는 신앙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교회는 수많은 세월 동안 예수를 놓고 씨름해 왔고, 예수를 어떻게 고백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두고 끝없는 논쟁을 반복해 왔다. 예수로부터 시작된 하느님 나라 운동이 도리어 예수 때문에 걸림돌이 되는 역설적인 상황 또한 한두 번이 아니었다.
쉽게 말해, 예수를 어떻게 신앙할 것인가를 둘러싼 견해 차이로 교회는 분열되었고, 어떤 무리들은 이단으로 정죄되어 공동체 밖으로 축출되기도 했다. 이러한 불행한 역사는 지금까지도 반복되고 있다. 바울은 “그리스도가 전파되기만 하면 된다”고 말했지만, 오늘 우리가 이 말을 듣는다면 그것은 분열된 교회 현실을 애써 봉합하려는 자기 위안처럼 들릴 뿐이다. 이 과정 속에서 ‘교회를 위한 예수’가 자리를 굳혔다.
모든 것이 제도화되는 순간 생명력을 잃듯, 예수 운동 역시 교권의 틀 속에 묻히며 본래의 의미를 상실해 왔다. 그 결과 교회는 예수가 무엇을 하려 했는지, 무엇을 실제로 했는지, 그 운동이 무엇을 지향했는지를 묻기보다 예수를 특권화해 교회의 방패막이로 삼는 데 더 민첩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등장하는 ‘대심문관’ 이야기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이반이 들려준 이 이야기는 오늘날 교회가 상정하는 예수상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다시 나타난 예수는 왜 체포되었는가
소설 속에서 예수는 중세 종교재판이 극성을 부리던 스페인 세비야에 예언처럼 재림한다. 그는 예전처럼 군중을 축복하고 병자를 고치며, 죽은 아이를 살리는 기적을 행한다. 불과 얼마 전까지 그 도시의 광장에서는 ‘하느님의 영광(Soli Deo Gloria)’을 위한다는 명목 아래 수많은 이단자들이 화형당했다. 대심문관은 곧 예수의 재림을 알아보고, 주저 없이 그를 체포한다. 이미 교회는 ‘든든히 서 있었고’ 모든 것이 잘 돌아가고 있었기에, 초대받지 않은 예수는 그들에게 방해꾼에 불과했다. 콘크리트 속에 박제된 채 예물만 흠향해 주면 되는 신이 다시 살아 돌아왔다는 사실만큼 불쾌한 일도 없었을 것이다.
정연복의 『아름다운 사람 아름다운 신 예수』는 이러한 ‘교회를 위한 예수’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 제기다. 그의 부드럽고 산뜻한 문체와는 달리, 책 전반에 걸쳐 강조되는 예수는 교리에 매여 삼위일체의 한 위격으로만 인식되는 성자가 아니다. 정연복에게 예수는 자유인이며, 고난과 박해 속에서도 모든 사람이 생명을 얻는 하느님 나라 운동에 자신의 전 생을 바친 청년 운동가다.
이 예수는 성서 속에 갇힌 존재가 아니다. 같은 일을 했거나 하려는 이들이라면 누구와도 어깨를 나란히 하고 대화하며 동행한다. 그래서 예수의 이야기는 오늘의 전태일의 이야기이자, 서준식·신영복·박노해의 이야기와도 깊이 맞닿아 있다. 그들이 던진 질문과 메시지가 예수의 가르침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예수가 새로운 시대, 새로운 언어로 다시 살아와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음을 느낀다. 교회의 전유물처럼 굳어 있던 예수가, 글쓰기를 통한 일종의 ‘초혼굿’을 거쳐 다시 움직이며 돌아다니는 장면을 목격하는 셈이다.
정연복은 살갑게 속삭이듯 예수를 이야기하지만, 그 속에는 분명한 문제의식이 담겨 있다. 그는 ‘부드러운 직선’으로 살아 있는 예수를 잃어버린 교권에 정면으로 맞서며, 민중의 눈높이에 선 신학을 이 땅의 기독 청년들에게 제시한다. 그의 질문은 분명하다. “오늘, 예수는 어디에 있는가?” 그 예수를 찾아 그와 잇대어 사는 것, 그것이야말로 참된 그리스도인의 길이라는 것이다.
책을 끝까지 읽으며 무엇보다 깊이 다가온 것은, 저자가 글을 쉽게 쓰기 위해 얼마나 애써왔는가 하는 점이었다. 그는 오늘의 신학을 이렇게 질타한다.
맹물처럼 맛없는 신학, 앵무새처럼 교리를 반복하는 신학, 분열된 세상에 또 다른 분열을 더하는 관념과 추상의 신학, 하느님 나라와는 무관한 종교적 유희로 전락한 신학…… 예수 이야기를 따분한 교리로 바꾸어 결국 그 나라의 실현을 가로막는 ‘죽임의 신학’은 아닙니까? (137쪽)
오늘의 언어로 다시 걷는 예수
신학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야 하며, 민중의 아픔과 절망, 희망에 동화되는 살아 있는 사유여야 한다. 이 책 곳곳에서 예수를 새롭게 읽고 느낄 수 있었지만, 특히 인상 깊었던 대목은 『전태일 평전』에 기대어 읽은 마가복음의 예수 이야기였다. ‘철조망을 넘어서’,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냐’, ‘나눔이 기적이다’와 같은 글들은 2천 년 전 예수의 이야기를 오늘의 현실 속에 생생히 재현해 낸다. 이 대목에서 나는 시인의 상상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도 있다. 글 전반에 걸쳐 독자를 계몽하거나 선동하려는 어조가 유지된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이는 저자의 오랜 기독청년운동의 영향일 수 있으나, 일반 독자에게는 다소 부담으로 다가올 여지도 있다. 특히 서준식, 신영복, 박노해, 전태일 등의 인물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라면 글이 어렵거나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또한 예수 개인에게 조명이 과도하게 집중되어 예수 운동이 아닌 예수 개인만 과잉 해석되는 것은 아니냐는 문제 제기도 가능하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들 역시 우리의 익숙한 자기 검열에서 비롯된 기우일지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정연복이 시도한 ‘기대기 전법’의 예수 읽기가 오늘의 현실 속에서 예수 이야기를 성공적으로 재맥락화했다는 점이다. 이는 독자에게 충분히 신선한 자극을 준다. 최근 『달라이 라마, 예수를 말하다』처럼 타종교의 시선으로 예수를 읽는 시도들이 등장하는 일 역시 같은 흐름일 것이다. 서로 다른 이야기들이 예수 이야기와 만나고 교배되며 새로운 생명력을 얻는 일, 그것이야말로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작업이 아닐까.
한때 얼음 속에서 발견된 매머드의 세포로 멸종된 생명을 복원하려는 시도가 있었듯, 예수 이야기 역시 끊임없이 다른 이야기들과 만나 다시 살아나야 한다. 오랫동안 교회가 예수 이야기를 전유하며 생명력을 소진시켜 온 만큼, 이제는 ‘재미있는 예수들’의 행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어야 할 때다. 『아름다운 사람 아름다운 신 예수』는 그 시작을 알리는 의미 있는 신호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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