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9. 20. 21:04ㆍ짧은 생각
한 중국의 왕이 있었다. 그에겐 두 명의 궁정화가가 있었는데, 그들은 언제나 적수 관계였다. 늘 싸우고 경쟁했으며, 누가 더 재능 있는 화가인지 가려내기도 어려웠다. 둘 다 그림의 대가였던 것이다.
어느 날 왕이 말했다.
“그대들 둘 중에 누가 더 위대한 화가인지 가려내기 위해 한 가지 주제를 주겠다. 이 주제를 놓고서 그림을 한 점씩 그려 보라. 주제는 '휴식'이다.”
두 화가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시간이 흘러 어느덧 작품이 완성되었다.
첫 번째 화가는 아주 구체적인 소재를 선택했다. 산속 깊은 곳의 고요한 호수, 수면에 물결 하나 일지 않는 그림이었다. 그 그림을 보는 것만으로도 잠이 소르르 쏟아졌다.

다른 화가는 보다 추상적인 쪽을 택했다. 그는 수십 미터나 물거품이 이는, 난폭하게 쏟아지는 거대한 폭포를 그렸다. 그리고 폭포 중간쯤 절벽에는 연약한 나무가 한 그루 있고, 성난 물줄기에 휘어진 나뭇가지 위엔 작은 새둥지가 있었다. 새둥지에는 울새 한 마리가 물에 흠뻑 젖은 채로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

첫 번째 화가의 그림은 생동감이 없는 침묵이었다. 그것은 거의 죽음과도 같은, 삶보다는 죽음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 속엔 대립이 없었다. 그 휴식은 긴장이 없는 휴식이었다. 그 휴식은 '있음在'보다는 '없음不在'에 가까웠다. 반면에 두 번째 화가의 그림은 역동성이 있었다. '휴식'이긴 했으나 죽은 휴식이 아니었다. 살아서 떨고 있는 휴식이었다. 때려 부술 듯이 쏟아져내리는 폭포의 물줄기, 작은 새둥지, 그곳에 눈을 감고 고요히 앉아 있는 울새 한 마리 ......
부처는 첫 번째 화가의 그림에 가깝지만
예수는 두 번째 화가의 그림이다.
부처의 침묵은 깊이가 있긴 해도 침묵과 반대되는 것이 빠져 있다. 반대 세계가 없이는 음악이 만들어질 수 없다. 그래서 부처는 단조로운 곡조일 뿐 오케스트라가 아니다.
예수는 반대 곡조들을 만나게 하고 충돌시켜서 하나의 하모니, 하나의 교향악을 창조한다. 부처의 침묵에는 혁명이 없으나 예수의 침묵은 무서운 반역과 혁명을 동반한 침묵이다. 이것을 이해해야 한다. 오직 그때만이 그대는 예수의 세계 속으로 깊이 들어갈 수 있다.
왜 예수는 그토록 중요한 인물이 되었는가?
왜 그는 지난 20세기 동안 그토록 많은 사람들에게 매력적이었는가?
그에게는 야생적인 면이 강하게 있는 것이다. 그는 잘 가꾸어진 정원이 아니라 야생적인 숲이다. 그는 다듬어지지 않은 나무이다. 그를 만져 보라, 그러면 알 것이다. 그를 느껴 보라, 그러면 알 것이다.
부처는 교양 있고 세련되다. 그에게는 왕의 기품 같은 것이 있다. 반면에 예수는 시골 출신이고 목수의 아들이며 전혀 배우지 못했다. 그는 거친 황야와 같다. 그 대신 살아 있고 반역적이다. 그래서 매력적인 것이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의 가슴을 울리는 것이다. 그대는 그를 이해할 수 있다. 그는 높은 차원으로 올라갔으나 그대가 그 곁에 설 수 있다. 부처를 이해하긴 어렵다. 부처는 그대에게서 너무나 멀다. 말 그대로 차원이 너무 높다. 예수는 그렇지 않다. 예수에게는 건너갈 다리가 있다.
오쇼 라즈니쉬, <예수, 도道를 말하다>(도서출판 예하, 1991), 19-21쪽
나는 라즈니쉬를 썩 좋아하지 않는다. 그는 종교 감각과 언변이 뛰어난 사이비 교주였다. 1960년대 베트남 전쟁 이후, 서구 젊은이들의 반전운동과 히피 열풍은 당시만 해도 낯설었던 인도 요가와 영적 수련에 눈을 돌리게 하였다. 그런 분위기에 힘입어 라즈니쉬도 수많은 추종자를 거느린 구루(Guru), 곧 '영적 지도자'로 급부상하였다. 한국에서도 라즈니쉬는 1980년대에 큰 인기를 얻었다. 그의 책 <배꼽>이 베스트셀러가 될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롤스로이스 수집광에다 '섹스 구루'란 별칭이 붙을 정도 광기 어린 종교집단을 만들어 많은 물의를 빚었다. 라즈니쉬가 남긴 폐해는 아직 다 사라진 않았다.
이와 별개로 그가 남긴 많은 책 중에 읽어볼 만한 책도 일부 있다. '사이비 교주'가 남긴 책에서 건질 게 무엇이 있겠느냐며 아예 그의 책을 거들떠보지도 않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다. 그거야 자유이고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다만 이런 말이 있다. "아무리 거짓을 쓴 책이라도 현자의 눈으로 보면 거기서 진리의 빛이 발한다" 라즈니쉬 책이라 해도 잘 가려서 읽는다면 유익한 교훈도 얻을 수 있다. 특히 내가 추천하고픈 책은 <예수, 도道를 말하다>이다. 그 책 말고도 <나를 따르라>, <너희에게 이르노니> 같이 예수의 가르침을 강해한 라즈니쉬의 책들이 있다. 그런 책도 좋긴 하나, 라즈니쉬 책들은 한 권만 읽어 보면 엇비슷한 서술 방식을 취하기에 별로 신선한 자극을 받지는 못할 거다.
<예수, 도道를 말하다>에서 인상 깊었던 내용 중 하나가 위에 인용한 이야기이다. 라즈니쉬는 '휴식'이란 주제의 두 그림을 들어 붓다와 예수의 차이를 설명한다. 이러한 설명에 공감하지 않을 분들도 있겠지만, 대체로 수긍할만한 통찰이 아닌가 싶다. 불경을 읽어 보면 붓다의 가르침은 어떠한 감정이 묻어 있지 않아 보인다. 마치 '천상'에서 들려오는 소리랄까. '좋은 말씀'이긴 하나 그다지 감흥을 불러일으키진 못한다. 깨달은 자의 목소리라서 그런지 몰라도 우리와는 너무 차원이 다른 세계 사람의 말처럼 들린다.
반면 예수의 가르침은 그렇지 않다. 예수는 청년이었고, 가난한 목수 출신이었으며, 로마제국의 식민지인 팔레스틴에 살았다. 그는 수많은 적에 둘러 쌓여 있었고, 공생애 말기에는 십자가 처형을 앞두고 제자들에게까지 버림받았다. 그 험난한 여정 가운데서 온몸으로 부대끼며 줄곧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한 것이다. 라즈니쉬가 말한 두 번째 화가의 그림은 예수의 생애를 상징적으로 잘 드러낸다. 실제로 예수는 지금도 숱한 사람을 매료시킨다. 또한 학자들은 벌써 수백 년째 예수 연구를 하는 중이다. 그만큼 예수는 끊임없이 새로운 자극과 도전을 안겨 주는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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