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9. 11. 09:05ㆍ기독교 이해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교 복음을 전파하다가 여러 차례 붙잡혀 감옥에 갇혀 지내야 하였습니다. 그는 감옥에서 빌립보서와 빌레몬서 같은 편지를 남겼습니다. 바울이 살던 시대는 서기 1세기입니다. '종이'는 2세기 초반 중국의 관리인 채륜이 발명하여 차츰 널리 퍼졌습니다. 바울이 살던 시대에는 '종이'가 없었습니다. 그러면 그는 빌립보서와 빌레몬서 같은 옥중서신을 어디에, 어떻게 기록하였을까요? 로마제국의 감옥에서 죄수가 과연 집필하는 게 가능하였을까요?

1. 로마 제국 감옥에서의 집필 가능성
로마 제국 시대의 감옥은 오늘날의 감옥과는 상당히 달랐습니다. 죄수는 대부분 재판 대기 기간 동안 임시로 수감되었으며, 장기 수감보다는 처벌(예: 사형, 추방, 노동 등)이 더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러나 특정 상황에서는 오랜 기간 동안 감옥에 머무르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바울은 '로마 시민권'을 갖고 있었습니다. 덕분에 그는 비교적 덜 가혹한 조건에서 수감 생활을 하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로마 시민에게는 최소한의 권리가 보장되었기에 편지를 쓰고 외부에 보내는 게 허용되었습니다.
당시 바울은 편지를 직접 집필하기도 했지만, 이따금 서기관이나 동료들에게 대필하게 하기도 했습니다.가령 로마서의 끝 부분에는 바울의 서신을 대필한 '서기관 더디오'의 이름이 나옵니다(로마서 16:22). 이러한 방식으로 바울은 옥중에서도 서신을 남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2. 로마 제국의 다른 죄수 중 옥중에서 집필한 사례
사도 바울 외에도, 로마 제국의 죄수 중에서 감옥에서 저술을 남긴 유명한 인물들이 있습니다. 그 중 몇 사례를 살펴보면:
- 보에티우스: 기원후 6세기 철학자인 보에티우스는 감옥에서 그의 가장 유명한 저작인 **'철학의 위안'**을 집필했습니다. 그는 정치적 이유로 감옥에 갇혀 있었으며, 철학을 통해 자신의 고통을 달래고자 했습니다.
- 세네카: 1세기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는 정치적 망명과 가택 연금 상태에서도 많은 저술을 남겼습니다. 그 중에는 스토아 철학에 대한 저서와 도덕적 에세이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 이그나티우스 (Ignatius of Antioch): 이그나티우스는 로마로 이송되는 도중 여러 교회에 서신을 남겼습니다. 에베소인들에게, 마그네시아인들에게, 로마인들에게 보낸 서신들이 있으며, 감옥에서 순교를 앞두고 쓴 이 서신들은 초기 기독교의 중요한 문서로 남아 있습니다.
3. 당시 파피루스 구입 문제
1세기 로마 제국에서는 파피루스와 같은 기록 매체가 일반적으로 쓰였습니다. 파피루스는 이집트에서 수입된 재료로, 당시 상당히 흔하게 쓰이던 문서 작성 도구였습니다. 기록을 남기기 위해서는 파피루스나 잉크, 펜(촉)이 필요했으며, 이러한 물품들은 감옥 내에서 구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바울과 같은 로마 시민은 외부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친구나 제자들이 파피루스와 같은 물품을 공급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파피루스는 흔히 상점에서 구입할 수 있었고, 필기 도구들도 상인들이 제공했습니다. 바울이 감옥에서 기록을 남길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물품을 외부에서 조달한 덕분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성경에서도 바울이 종종 외부의 동료들에게 필요한 물품을 요청하는 장면들이 나옵니다(예: 디모데후서 4:13, "내가 올 때에 내가 트로아에서 가보의 집에 둔 겉옷을 가지고 오고 또 책은 특히 가죽종이에 쓴 것을 가져오라").
파피루스는 이집트에서 주로 생산되었고, 로마 제국 전역으로 수출되었습니다. 당시 파피루스 두루마리는 귀중한 물품이었으며, 일상적으로 사용되던 서민들은 직접적으로 많은 양을 사용할 여력이 없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주로 공식 문서 작성이나, 학자들, 상류층, 그리고 국가적인 기록용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고대의 일부 경제적 기록과 문헌에 따르면 파피루스 한 장(대략 오늘날 A4 크기와 유사한 크기)의 가격이 2 드라크마에서 4 드라크마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당시 1 드라크마는 숙련된 노동자가 하루에 벌 수 있는 임금에 해당했기 때문에, 파피루스는 서민들에게는 꽤 값비싼 물품이었습니다.
- 두루마리의 경우, 길이에 따라 가격이 다를 수 있지만, 일반적인 파피루스 두루마리 하나의 가격은 몇 드라크마에서 시작하여 10 드라크마 이상일 수 있었습니다. 이는 약 5~10미터 길이의 두루마리로, 긴 문서를 기록하기에 충분한 크기입니다.
따라서, 파피루스는 상류층과 학문적 활동을 하는 이들, 혹은 공식적인 용도로 주로 사용되었으며, 그 가격은 일반 서민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기에는 부담스러운 수준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동역자들과 후원 교회들의 협력으로 파피루스 두루마리를 구입해 기록을 남겼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결론
사도 바울은 당시 로마 제국의 감옥 제도와 그의 시민권 덕분에 비교적 자유롭게 서신을 집필하였을 것입니다. 바울 외에도 세네카나 보에티우스, 이그나티우스와 같은 인물들이 감옥에서 저술을 남겼습니다. 당시 파피루스와 같은 기록 매체는 상점을 통해 쉽게 구입할 수 있었습니다. 파피루스 두루마리는 서민이 구입하기에는 부담스러운 가격이었지만, 바울은 그의 동역자와 교회들의 후원에 힘입어 그것을 구입하여 썼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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