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진정한 형상에 관하여

2026. 2. 4. 14:28ㆍ책 읽기

진리의 사건과 윤리의 재구성

 

흔히 윤리라고 하면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규칙 준수를 떠올리기 쉽다. 게다가 현대인들은 "윤리"나 "도덕"적 주장들에 식상해하며, 고리타분하게 여기는 경우도 많다. 왜 그럴까? 이 책에 따르면, 그리스어로 '윤리'는 올바른 존재 방식의 추구, 즉 행위의 지혜를 뜻한다. 따라서 윤리는 단순한 규칙 준수가 아니라, 각자의 삶의 양식에 대해 성찰하고, 자신의 행위를 그 성찰의 결과에 맞추려는 노력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윤리는 왜 사람들에게 신뢰를 주지 못할까? 바디우는 윤리에 대한 근본적 비판에서 출발한다. 그는 오늘날 '윤리'가 사회적·역사적·매체적·기술적·과학적 상황들에 대한 어렴풋한 조절에 불과하며, 실상 진정한 허무주의에 다름 아니라고 지적한다. 이는 모든 사고를 위협하는 부정이며, 따라서 바디우는 윤리의 의미를 근본적으로 재정의하고자 한다. 그는 윤리를 추상적 범주(인간, 권리, 타자 등)에 맞추기보다는, 구체적 상황과 관계하며 개별적 과정에 대한 지속 가능한 준칙과 진리의 운명을 문제 삼는 것으로 재구성한다.

 

그는 이를 뒷받침하는 사례로 '인간의 죽음', 즉 주체의 죽음이라는 테마를 강조한다. 푸코, 알튀세, 라캉의 주장은 인간의 운명에 대한 무관심이나 냉소가 아니라, 기존 질서에 대한 근본적 불만족과 반란에 부합한다. 반면, 윤리와 인권이라는 테마는 서양 부자들의 이기적 만족, 권력 행사, 광고의 도구로 전락했다. 이는 아이러니하다.

 

바디우에 따르면, 문제의 핵심은 윤리를 인권과 인도주의적 행위에 맞추는 보편적 인간 주체의 가정에 있다. 그는 이런 윤리의 이데올로기적 장치를 과감히 거부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를 위해 그는 오늘날 유행하는 레비나스의 '타자에 대한 윤리'에 도발적으로 반기를 든다. 바디우는 레비나스가 전제하는 '동일자의 이론적 존재론'보다 '타자의 윤리학'이 우위에 있다는 주장이 사실상 종교적 공리에 기초하고 있다고 본다.

 

쉽게 말해, 레비나스는 윤리를 필연적으로 종교적이라고 전제한다. 그러나 바디우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또한 레비나스가 말하는 '타자'도 우리의 비위를 거슬리지 않는 '좋은 타자'에 국한되지 않느냐는 의문을 제기한다. 예를 들어 "자유의 적에게 자유란 없다"는 말처럼, 근본주의적 자들은 존중하지 않는데, 이때 레비나스의 '타자'는 결국 우리의 동일자와 다르지 않게 된다.

 

바디우는 무한한 다양성이 단순히 주어진 것이며, 어떠한 경험도 무한한 차이의 전개라고 본다. 심지어 자아에 대한 반성적 경험조차도 통일성을 직관하는 것이 아니라, 차별화들의 미로일 뿐이라고 말한다. 이 점에서 그는 레비나스를 비판하며 다소 상대주의적 입장으로 기울었을 수 있다. 그는 뒤에서 "정치, 애정, 학문, 예술이 식별 가능함"을 강조하며 무분별한 상대주의에 빠지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규범을 거부하면서 규범을 말하려는 시도는 다소 어설프게 보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디우가 악의 문제를 중요하게 다루는 이유는 분명하다. 어떠한 사람도 선과 악을 초월할 수 없으며, 윤리에 대한 사유 역시 선과 악에 대한 인간의 끊임없는 성찰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악을 단순히 선의 결핍이나, 플라톤처럼 진리의 부재 혹은 선에 대한 무지로 간주할 수 없다는 점을 그는 강조한다. 악의 존재는 체계적 방식에 의한 사례를 통해 파악될 수 있으며, 비록 다양하게 나타나더라도 선(진리)의 가능성으로서 출현해야 한다. 즉, 악이 존재하는 이유는 진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바디우는 윤리 준칙을 진리의 생성에 종속시키는 수용 가능한 윤리 개념을 재구성한다. 그 준칙은 일반적 형식 속에서 “계속하시오!”라는 명령으로 표현된다. 즉, 다른 인간과 똑같은 동물이 되지 말고, 진리의 사건적 과정 속에서 포착되고 전위된 **‘어떤 자’**로 존재하라는 것이다.

그는 선(진리)에 의존하는 악의 세 가지 진정한 형상을 제시한다.

  1. 시뮐라크르: 거짓 사건에 충실하며 테러적 존재로 나타나는 것
  2. 배반: 자기 이해와 관심을 위해 진리를 양보하는 것
  3. 명명될 수 없는 것에 대한 촉성(促成) 또는 파국: 진리의 힘이 전능하다고 믿는 것

결국, 바디우의 '진리들의 윤리학'은 “계속하시오!”라는 정언명령 하에서 식별(시뮐라크르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 용기(양보하지 않기 위해), 유보(총체성의 극단성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를 결합한다. 기존 윤리의 추상적·보수적 면모를 극복하고, 진리에 대한 자신의 충실성을 통해 악을 피하고 진리의 어두운 면을 파악하는 것이다.

 

철학 서적이지만, 분량이 작다고 만만하게 보기에는 내용이 매우 어렵다. 독해가 쉽지 않으며, 이해되지 않는 부분도 많다. 그러나 결론에 다다르면, 윤리와 악, 그리고 진리들의 관계에 대한 대략적인 윤곽을 잡을 수 있다. 인내심을 가지고 끝까지 읽으면, 독자는 상당한 지적 긴장과 통찰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저자 알랭 바디우는 현재 파리 고등사범학교 철학과 주임 교수로 재직 중이며, 다수의 무게 있는 저서를 집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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