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6. 24. 00:33ㆍ생수 한 모금
명월: 송도 기생 명월(황진이)입니다. 화담 선생의 소문이 자자해서 꼭 한 번 뵙고 싶어 기다렸는데
벌써 날이 어두워졌네요. 하룻밤 묵어 가도 되겠습니까?
화담: 자네, 세상을 다 아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구먼. 마음 가는 대로 하시게.
***
화담: 나무 한 그루가 자네가 가야 할 길을 막고 있다면 어쩌겠는가?
명월: 나무를 피해 비껴갈 것입니다.
화담: 비바람이 앞 길을 막는다면 어쩌겠는가?
명월: 비 바람이 멎기를 기다리겠습니다.
화담: 자네를 막고 있는 그것들에게 왜 화를 내지 않는가?
명월: 자연의 현상임을 어찌하겠습니까?
화담: 자연이 너의 마음을 흔들지 않는 것은 자연에겐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너를 힘들게 하는 것은 삶에 연연하는 이기적인 마음이다.
명월: 제가 그 마음을 버린다면 세상을 알 수 있습니까?
화담: 세상 모두가 너와 하나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것이 진리요, 너의 참모습이다.
영화 <황진이>(장윤현 감독, 2007)의 한 장면입니다. 화담 서경덕과 황진이가 실제 이런 대화를 나눴을 리는 없습니다. 감독이나 시나리오 작가가 상상으로 꾸며본 거겠지요. 명월은 송도 기생으로 시문에 능해 한양까지 그 명성이 자자하였습니다. 그런 명월이 화담 서경덕을 유혹하였으나 화담은 넘어가지 않았고 명월이 그를 스승으로 모셨다고 전해집니다.
영화 <황진이>에 나오는 화담과 명월의 대화는 화담 선생의 '자연주의' 철학사상인 기이론을 참고하여 꾸며낸 거 같습니다. 화담은 이기적 마음을 내려놓으면 "세상 모두가 너와 하나임을 깨닫게 될 것"이라며 '물아일체' 사상을 피력합니다. 그는 '자연'에는 '마음'이 없다며 인위적 욕심을 벗어나 자연과 자신이 하나임을 깨닫는 삶을 가르칩니다. 심오한 가르침입니다.
하지만 사람이 자신을 내려 놓는 게 가능한 일일까요? 사람 자체가 욕망덩어리인데 말입니다. 세상에 초연하고 자연과 하나 된 삶이란 물이나 바람, 잡초 같은 삶이나 다름없습니다. 명월이 화담 선생을 '스승'으로 모신 걸 보면 화담 서경덕은 그 경지를 보여준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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