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바울'은 개종 이후 개명했을까?

2024. 5. 31. 16:14기독교 이해

 

"박해자 '사울'이 '바울'로 개종하고 개명한 뒤 열정적인 선교사가 되었다"

 

교회 목사님들 설교나 기독교 서적에서 흔히 듣거나 찾아볼 수 있는 말입니다. 가령 이재철 목사는 그의 책 <매듭짓기>(2005)에서 "사도행전 9장에 이르면 나중에 바울로 개명한, 그 유명한 사울의 회심이 일어난다"고 말합니다. 김교신 선생도 그의 책(<김교신전집 3: 성서개요>(2021)에서 "~~시몬이 베드로로, 사울이 바울로 개명한 것과 방불한 일이다."라고 썼습니다. 사도 바울은 본디 이름이 '사울'인데 '바울'로 개명하였음을 마치 뚜렷한 사실처럼 언급한 것입니다.

 

사울이 바울로 개명하였다는 주장은 한국만 널리 퍼져 있는 게 아닙니다. 독일어 관용구에는 "Vom Saulus zum Paulus"라는 말이 있습니다. 부패하고 무능하다고 알려진 정치인이 청렴하고 유능한 인물로 변화되었거나 한때 무능하게 여겨지던 직장인이 열심히 노력해 유능한 전문가로 인정 받을 때에 "사울에서 바울로"라는 표현을 사용한답니다. 

 

그러면 바울은 실제로 '사울'이란 이름을 갖고 있다가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뒤 '바울'로 개명한 것일까요? 사실 그는 자신이 남긴 서신에서 '바울'이란 이름만 사용하지 한 번도 '사울'이란 이름은 사용하지 않습니다. 바울을 '사울'이라고도 칭하는 책은 <사도행전>입니다. 사도행전은 기독교 박해자로 활동하던 청년 사울에 대해 알려줍니다. 그러다가 13장 9절에 이르러 처음으로 "바울이라고도 하는 사울은 성령으로 가득 차서 엘루마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며, 사울의 별명이 '바울'임을 처음으로 말합니다. 그 이후 사도행전은 슬그머니 바울이란 이름을 줄곧 사용합니다. 

 

하지만 사도행전조차 청년 사울이 개종한 뒤 자신의 이름을 '바울'로 개명하였다고 알려 주지 않습니다. 사도행전은 청년 사울이 다마스커스에 기독교인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서 그들을 붙잡아 예루살렘으로 끌고 오려고 그곳으로 갑니다. 그 도중에 부활 예수님을 만나 부르심을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사울은 다마스커스의 아나니야에게 세례를 받고 그곳에서 "예수님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라고 선포하기 시작합니다(행 9:20). 그 뒤 그는 안디옥교회 교사 중 한 사람으로 활동하는데, 당시까지도 그의 이름은 '사울'로 나옵니다(행 13:1, 3-4). 즉 사도행전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뒤에도 한 동안 '사울'이란 이름을 그대로 사용합니다. 사도행전은 바울이 '사울'에서 '바울'로 개명하였다고 그 어디에서도 말하지 않습니다. 

 

사실 그레코-로마 세계에서 유대인, 특히 디아스포라 유대인이 히브리식 이름과 로마/그리스식 이름을 둘다 지닌 경우는 매우 흔하였습니다. 이를테면 시몬(Simon)은 히브리식 이름이지만 베드로(Peter)는 헬라식 이름입니다. 요한(John)은 히브리식 이름이지만 마가(Mark)는 로마식 이름입니다. 요셉(Joseph)은 히브리식 이름이지만 유스도(Justus)은 로마식 이름입니다. 도마(Thomas)는 히브리식 이름이지만 디두모(Didymus)는 헬라식 이름입니다. 예수(Jesus) 는 히브리식 이름이지만 유스도(Justus)는 로마식 이름입니다. 이처럼 당시 두 가지 이름을 가진 유대인은 흔히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재미 교포 중에 한국식 이름과 영어식 이름을 가진 분이 많은 거와 유사한 일입니다. 

 

바울도 이중 이름, 곧 히브리식 이름과 로마식 이름을 사용하였던 걸로 보입니다. 그의 히브리식 이름인 '사울(שָׁאוּל)'은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 사울에게서 따온 것입니다. 사울이란 이름 뜻은 '간구하다' 또는 '기도하다'입니다. 그의 로마식 이름 바울(Παῦλος, Paulus)은 "작은" 또는 "겸손한"을 뜻하는 라틴어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베냐민 지파 출신이라 밝힙니다. 사울 왕은 베냐민 지파 출신인데, 바울을 비롯해 베냐민 지파 출신 중에 '사울'이란 이름을 지닌 사람은 아마 많았을 겁니다. 그 지파에서 배출한 왕의 이름이니 말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신을 '사울'이라고 한 번도 직접 밝히지 않습니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요? 그의 서신 수신인이 모두 이방인이라 굳이 '사울'이란 이름을 사용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또한 바울의 히브리식 이름이 실제로 '사울'이었는지도 분명하지는 않습니다. 사도행전 저자가 과연 바울을 정확히 잘 아는 사람이었는지 다소 의문스럽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의 바울과 사도 바울 자신이 말한 바울의 이미지를 대조해 보면 적지 않은 차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가령 사도행전에서는 바울이 귀신을 내쫓고 병자를 고치는 등 많은 이적을 행하였다고 묘사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의 서신 어디에서도 자신이 신유와 이적의 권능을 행하였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 당시 로마 시민은 일반적으로 praenomen(이름), nomen(성), cognomen(별명 또는 성)으로 이루어진 이름인 트리아 노미나(tria nomina)를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모든 로마인이 트리아 노미나 형태의 이름을 사용한 것은 아닙니다. 바울이란 이름은 단축형의 별명(cognomen)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사도행전은 바울과 바나바가 키프로스 섬 전체를 두루 다니다가 파보스에 이르러 그 지방 총독(프로콘술) 세르기오 바울을 만났고 그를 전도하였다고 알려줍니다. 작가 아이작 아시모프는 그의 책 <아이모프의 바이블>(들녘, 2002)에서 "세르기오 바울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혹은 프로콘술의 개종을 이끌어낸 그의 성공을 기념하기 위해" '바울'이란 이름을 채택하였을 것이라 추정합니다. 하지만 이는 '추정'일 뿐, 정확한 사실 관계는 알 수 없습니다. 

 

신약성서 학자 중에서도 바울의 이름에 대한 가설은 크게 세 갈래로 나뉩니다. 존 폴힐(John Polhill)과 브루스(F.F. Bruce) 바울이 개종한 뒤 그의 사명과 사역의 전환점을 나타내고자 새로운 이름을 사용하였다고 주장합니다. 이른바 개종 이론(Conversion Theory)입니다. 반면 톰 라이트(N. T. Wright)와 브라운(R. E. Brown)은 이방인들에게 친근히 다가가고자 로마식 이름을 사용하였다는 실용성 이론 (Practicality Theory)을 내세웁니다. 

 

실용성 이론은 바울이 로마 제국에서 사역할 때 이방인 청중에게 더 친숙하게 다가가기 위해 로마 이름을 사용했다고 보는 가설입니다. 끝으로 제임스 던(James D. G. Dunn)과 크레이그 키너(Cragig S. Keener)는 바울 자신이 유대적 배경과 로마적 배경 두 가지를 동시에 갖고 있었기에 히브리식 이름과 로마식 이름을 갖고 있었다는 '이중 이름 전통'(Dual Name Traditon)을 주장합니다. 

 

한편 이탈리아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은 그의 책 <남겨진 시간>에서 "사도행전 저작자가 그때까지 사울로스라고 불렀던 인물의 이름을 갑자기 파우로스로 변경시키는 것은 결코 무의미한 행위가 아니다"(23쪽)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스스로를 "사도들 중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정의한다(고전 15:9)며 왕가의 이름 사울로 불렸던 자가 '작고 보잘것없는 자'란 의미의 '바울'이란 이름을 얻은 것은 "메시아적인 소명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라 설명합니다. 즉 아감벤도 개종 이론을 뒷받침하는 주장을 펼칩니다. 이런 주장은 흥미롭지만 성서로 그 가설을 입증하긴 어렵습니다. 신약성서는 바울이 '사울'이란 이름을 버리고 '바울'이란 이름으로 개명하였다고 그 어디에서도 뚜렷이 밝히지 않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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