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에게 영감을 얻은 세계적인 인물 30명

2023. 2. 27. 12:01기독교 이해

예수에게 영감을 얻은 세계적인 인물 30명

 

 

렘브란트, <탕자의 귀환>(1669)

 

1. 마틴 루터킹 목사(Martin Luther King Jr).: 마틴 루터킹 목사(1929-1968)1954년부터 1968년 암살될 때까지 민권 운동에서 가장 눈에 띄는 대변인이자 지도자가 된 미국 침례교 목사이자 활동가였습니다. 그는 사랑과 비폭력에 대한 가르침을 미국에서 인종 차별과 차별을 종식시키기 위한 작업의 기초로 보았습니다.

 

2. 데스몬드 투투(Desmond Tutu): 데스몬드 투투 대주교(1931년생)는 남아프리카 성공회 성직자이자 신학자로서 남아프리카에서 반인종차별 정책 운동의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사랑과 용서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에 영감을 받았고, 이를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인종차별정책(아파르트헤이트)를 종식시키고 화해를 촉진하기 위한 노력의 기초로 보았습니다.

 

3. 오스카 로메로(Oscar Romero): 오스카 로메로(Oscar Romero, 1917-1980)는 산살바도르의 대주교를 역임한 엘살바도르의 로마 가톨릭 사제로 엘살바도르에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옹호하는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그는 정의와 연민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에서 영감을 얻었고, 자신의 일을 그 가르침을 행동으로 옮기는 방법으로 여겼습니다.

 

4. 코리 텐 붐: 코리 텐 붐(1892-1983)은 홀로코스트 기간 동안 가족과 함께 유대인들이 나치로부터 탈출하는 것을 도운 네덜란드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그녀는 사랑과 연민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에 영감을 받았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도와 그 가르침을 실천하는 방법으로 자신의 일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5. 도로시 데이(Dorothy Day): 도로시 데이(1897-1980)는 노숙자와 굶주린 사람들을 환대하는 집 네트워크인 가톨릭 일꾼 운동을 공동 창립한 미국 언론인이자 사회 운동가였습니다. 그녀는 사랑과 봉사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영감을 얻었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도와 그 가르침을 실천하는 방법으로 그녀의 일을 보았습니다.

 

6. 보노(Bono, 1960년생)는 아일랜드의 음악가, 싱어송라이터로 록 밴드 U2의 리드 보컬로 가장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또한 세계 빈곤과 HIV/AIDS와의 싸움을 포함한 다양한 대의를 옹호하기 위해 자신의 플랫폼을 사용한 활동가이기도 합니다. 그는 정의와 연민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에서 영감을 얻었으며, 그러한 가르침을 행동으로 옮기는 방법으로 그의 작업을 보았습니다.

 

7. 장 바니에(Jean Vanier, 1928년생)는 지적 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위한 국제 공동체 네트워크인 라르쉐(L'Arche)의 설립자이자 캐나다 가톨릭 철학자이자 인도주의자입니다. 그는 사랑과 연민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에서 영감을 받았으며, 자신의 일을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도와 그 가르침을 실천에 옮기는 방법으로 여겼습니다.

 

8. 아미 카미챌(Amy Carmichael, 1867-1951)은 아일랜드 개신교 기독교 선교사로 인도에서 일했으며 성전 어린이와 인도의 아동 노예 제도 피해자를 구출하고 돌보기 위한 선교 단체인 도나버 공동체(Dohnavur Fellowship)를 설립했습니다. 그녀는 사랑과 연민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에서 영감을 얻었고, 그녀의 일을 사람들을 도와 그 가르침을 행동으로 옮기는 방법으로 보았습니다.

 

 

9.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St. Francis of Assisi, 1181-1226) -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프란치스코는 자신의 부를 포기하고 프란치스코 수도회를 세웠으며, 가난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거리에서 복음을 전파했고, 병자를 돌보았으며, 폭력과 불의에 반대했습니다. 모든 피조물에 대한 그의 사랑은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해 신을 찬양하는 "태양의 찬가"를 작곡하도록 영감을 주었습니다. 오늘날 프란치스코는 동물, 생태, 평화의 수호성인으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10. 넬슨 만델라(Nelson Mandela, 1918-2013) - 남아프리카에서 태어난 만델라는 반 아파르트헤이트 운동에 참여하여 시위와 시민 불복종 행위를 주도했습니다. 그는 27년 동안 투옥되었으나 정의와 화해를 위해 계속 싸워 그의 국민에게 희망의 상징이 되고 전 세계 사람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었습니다. 감옥에서 석방된 후 그는 아파르트헤이트 종식을 협상했고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되어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고 보다 정의롭고 포용적인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11. C.S. 루이스(1898-1963) - 아일랜드에서 태어난 루이스는 32세에 기독교인이 되었고 "순전한 기독교", "스크루테이프 편지", "나니아 연대기" 등 신앙에 관한 수많은 책을 저술했습니다. 그의 글은 깊은 신학적 통찰력과 생생한 상상력을 결합했으며 모든 연령과 배경의 독자들에게 계속해서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그는 또한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가르쳤으며 한 세대의 작가와 사상가를 멘토링했습니다.

 

12. 말라야 요사프자이(Malala Yousafzai, 1997-현재) - 파키스탄에서 태어난 Malala는 탈레반이 그녀의 지역을 장악하고 소녀들이 학교에 가는 것을 금지한 후에도 어린 나이에 소녀들의 교육에 대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2012년 그녀는 탈레반 총잡이에게 총을 맞았지만 살아남았고 여성의 권리와 교육을 위한 세계적인 옹호자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전 세계 소녀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Malala Fund를 공동 설립했으며 2014년에는 최연소 노벨 평화상 수상자가 되었습니다.

 

13. 프레더릭 더글라스(Frederick Douglass, 1818-1895) - 메릴랜드에서 노예로 태어난 더글러스는 자유를 찾아 탈출하여 주도적인 폐지론자가 되어 자신의 신문을 발행하고 전국에서 연설을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사용하여 노예 제도의 공포를 폭로하고 다른 사람들이 자유와 정의를 위해 싸우도록 영감을 주었습니다. 남북 전쟁 동안 그는 링컨 대통령에게 노예제와 흑인 군인 문제에 대해 조언했으며 전쟁이 끝난 후에도 계속해서 민권과 평등을 옹호했습니다.

 

14. 안네 프랑크(1929-1945) - 독일에서 태어난 안네와 그녀의 가족은 나치를 피해 암스테르담으로 피신했지만 결국 발각되어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습니다. 은신처에 있는 동안 Anne은 자신의 생각, 희망 및 두려움을 기록한 일기를 작성했습니다. Bergen-Belsen 수용소에서 사망한 후 그녀의 일기가 출판되어 인간 정신과 연민과 이해의 필요성에 대한 강력한 증언이 되었습니다.

 

15. 왠그리 마아타이(Wangari Maathai, 1940-2011) - 케냐에서 태어난 Maathai는 동부 및 중앙아프리카에서 미국에서 생물학을 공부하면서 박사 학위를 취득한 최초의 여성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케냐로 돌아와 환경 운동에 참여하여 여성들이 나무를 심고 환경을 복원할 수 있도록 하는 그린벨트 운동을 설립했습니다. 그녀는 또한 정부의 부패와 억압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냈고 지속 가능한 발전과 민주주의를 촉진한 공로로 2004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습니다.

 

16. 소저너 트루쓰(Sojourner Truth, 1797-1883)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노예제 폐지론자이자 여성 인권 운동가였습니다. 노예로 태어난 그녀는 자유를 찾아 탈출했고 평등권을 위한 강력한 옹호자가 되어 연설과 강의를 하기 위해 전국을 여행했습니다. 그녀의 유명한 "나는 여자가 아닙니까?" 여성의 권리 대회에서 전달된 연설은 성별과 인종에 대한 일반적인 생각에 도전했습니다.

 

17.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 1759-1833)는 노예 무역과 노예 제도 폐지에 평생을 바친 영국의 정치가이자 자선가였습니다. 그의 노력으로 1807년 노예무역법이 통과되었고 결국 대영제국 전역에서 노예제도가 폐지되었습니다.

 

18. 해리어트 비처 스토우(Harriet Beecher Stowe, 1811-1896)는 미국에서 노예 제도에 반대하는 여론을 고무시키는 데 도움을 준 그녀의 소설 "톰 아저씨의 오두막"으로 가장 잘 알려진 미국 작가이자 노예 제도 폐지론자였습니다. 수백만 부가 팔린 이 책은 남북 전쟁의 토대를 마련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고 여겨집니다.

 

19. 플로렌스 나이팅게일(1820-1910)은 영국의 간호사이자 사회 개혁가로 현대 간호를 창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크림 전쟁 동안 그녀는 간호사 팀을 이끌고 부상당한 군인을 돌보고 병원의 사망률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되는 혁신적인 위생 관행을 구현했습니다. 그녀는 또한 모두를 위한 더 나은 위생과 의료를 옹호했습니다.

 

20. 해리엇 터브먼(Harriet Tubman, 1822-1913)은 아프리카계 미국인 노예제 폐지론자이자 인도주의자였으며, 미국 남북 전쟁 동안 북군을 위해 무장한 스카우트이자 스파이였습니다. 노예로 태어난 터브먼은 탈출한 후 노예 제도 반대 운동가 네트워크와 Underground Railroad로 알려진 안전 가옥을 사용하여 약 70명의 노예를 구출하는 약 13개의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21. 엘리자베스 캐디 스탠톤(Elizabeth Cady Stanton, 1815-1902)은 미국의 여성 참정권 운동가, 사회 운동가, 폐지론자, 초기 여성 권리 운동의 지도적 인물이었습니다. Susan B. Anthony와 함께 그녀는 전국 여성 참정권 협회를 공동 창립하고 여성의 투표권, 재산 소유권, 교육 및 고용 기회를 옹호했습니다.

 

22. 마르틴 데 포레스(1579-1639)는 페루의 도미니코회 평신도 수사로 가톨릭 교회에서 성인으로 추앙받고 있다. 그는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겸손하고 이타적인 봉사는 물론 기적적인 치유와 동물과 소통하는 능력으로 유명했습니다.

 

23. 가가와 도요히코(1888-1960)는 일본의 기독교 평화주의자, 사회주의자, 노동 운동가로 가난한 사람들과 노동자 계급의 권리를 옹호하는 데 평생을 바쳤습니다. 그는 일본기독교사회협회를 창립하고 사회 정의와 기독교 윤리에 관한 수많은 책을 저술했습니다.

 

24. 압둘 사타르 에디(Abdul Sattar Edhi, 1928-2016)는 세계 최대의 민간 구급차 서비스 중 하나이자 보호소, 진료소, 고아원인 에디 재단을 설립한 파키스탄의 자선가이자 인도주의자였습니다. 그는 인종이나 종교에 관계없이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돕기 위해 평생을 바쳤으며 파키스탄에서 국가적 영웅으로 널리 여겨졌습니다.

 

25. 알버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 1875-1965)는 독일-프랑스 철학자, 신학자, 의사, 음악가였습니다. 그는 아프리카에서 가봉의 랑바레네에 슈바이처 병원을 설립한 인도주의적 활동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습니다. 50년 이상 동안 Schweitzer와 그의 아내 Hélène은 병원에서 주로 나병과 말라리아 환자 수천 명을 치료했습니다. Schweitzer는 뛰어난 음악가이자 모든 생명체의 상호 연결성을 강조하고 모든 형태의 생명체에 대한 존중과 보살핌을 요구하는 "생명에 대한 경외" 철학의 주창자였습니다. 그는 이 공로로 1952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슈바이처의 유산은 오늘날 전 세계 많은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26.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는 나치 독일에 대한 확고한 반대와 저항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으로 알려진 독일 신학자이자 목사였습니다. 그는 독일 브레슬라우에서 태어난 본회퍼는 여러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미국에서 학생과 목사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는 1931년에 독일로 돌아와 나치 정권이 권력을 잡자 점점 더 저항 운동에 가담하게 되었습니다. 본회퍼는 1943년 아돌프 히틀러 암살 음모에 연루된 혐의로 체포되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불과 몇 주 전인 19454월 교수형에 처해졌습니다. 본회퍼의 유산은 전 세계의 신학과 기독교 저항 운동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저서들과 감옥에서 남긴 서신들은 오늘날에도 계속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27. 문익환(1918-1994)은 한국의 구약학자이자 통일운동가입니다. 그는 북간도 명동촌 출신이며 시인 윤동주와 함께 자랐다. 프리스턴 신학대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한 뒤 연세대와 한신대에서 구약학을 가르쳤습니다. 한국 개신교와 가톨릭 학자들이 함께 번역한 <공동번역성서>(1977) 번역 작업에 참여하였습니다. 197631, 윤보선, 김대중, 문익환, 김승훈, 함석헌, 함세웅, 안병무 등과 3.1구국 선언을 주도하다 옥고를 치렀고, 친구 장준하의 의문사(1976. 8. 17) 이후 사회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습니다. 19893월 방북하여 김일성을 만나 느슨한 연방제에 의한 통일방안을 합의하였고 사회운동 과정에서 여러 차례 옥고를 치렀습니다.

 

28. 이세종(李世宗, 1880~1942)은 대한민국 전라남도 화순 도암 출신의 개신교 수도자이자 성서연구가입니다. 그는 머슴 출신으로서 거부가 되었다. 하지만 혼인한 뒤 15년 동안 슬하에 자녀를 얻지 못해 무당의 지시로 산당을 짓는 과정에서 목수에게 성경을 소개받았습니다.. 그 뒤 성경을 읽고 득도하여 기독교 신자가 되었으며 자신의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모두 나눠주고 한평생 성경을 연구하고 수도하는 데 바쳤습니다. 그는 이현필, 강신명, 현동완 등 여러 제자를 길러냈습니다.

 

29. 김교신(1901~1945)은 일제강점기 개신교 평신도이자 교육자, 사상가, 항일운동가입니다. 그는 일본 도쿄 유학 기간 동안 일본의 기독교 사상가 우찌무라 간조와 야나이하라 다다오에게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귀국한 뒤 사람들에게 기독교 사상과 독립 정신을 고취시킨 잡지인 <성서조선>을 발간하였습니다. 그가 <성서조선> 권두언으로 쓴 조와라는 글이 은연 중 항일의식을 불어넣는다는 이유로 일제는 그와 동지들을 붙잡아 옥에 가두었습니다. 김교신은 출옥한 뒤 흥남질소비료공장에서 조선인 노동자들을 위하여 일하다가 발진티푸스 감염으로 해방을 보지 못하고 사망하였습니다. 그의 일기와 성서연구 서적들, <성서조선>에 투고한 글들이 남아 있습니다.

 

30. 다석 유영모(1890-1981)20세기 한국 개신교의 사상가, 철학자입니다. 그는 서울에서 태어나 초대 YMCA 총무인 김정식의 인도로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평북 정주의 오산학교 교사로 2년 근무하였으며, 톨스토이를 깊이 연구한 뒤부터 기성 교회와 멀어졌습니다. 최남선의 잡지 <청춘>과 유영모의 잡지 <성서조선>에 여러 글을 기고하였고 서울 YMCA에서 오랫동안 기독교와 유불선을 아우르는 강의를 하였습니다. 그는 함석헌, 김흥호, 박영호 등의 제자들을 길러냈습니다. 그의 사상은 중국의 공자 사상에 비견될 정도로 심오하며 오늘날 많은 연구가 진행 중입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