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평

망상의 진실, 진실의 망상- 영화 《프라이멀 피어》

솔샘인 2025. 5. 6. 17:22

영화 서두에서 변호사 마틴 베일은 한 기자에게 이렇게 말한다.

 

"(법정에서) 진실은 중요하지 않다. 배심원이 믿는 망상이 진실이다. '진실의 망상'이라고나 할까."

 

이 대사는 단순한 냉소적 수사로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상 이 영화 전체의 주제이자 결말을 꿰뚫는 복선이다. 법정 영화는 종종 ‘진실’을 둘러싼 치열한 공방을 그리지만, 《프라이멀 피어》는 사건의 진실 자체보다, 사람들이 ‘진실’이라 믿는 것이 얼마나 쉽게 조작되고 왜곡될 수 있는지를 드러내는 데 초점을 맞춘다.

 

대주교 살해 사건의 용의자 청년 애런

이야기의 중심은 시카고 대주교 러시먼이 자신의 집무실에서 잔혹하게 살해된 사건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현장에서 피투성이 옷을 입은 채 도망치던 한 청년, 애런 스탬플러가 체포된다. 그는 대주교를 돕던 복사였고, 범행 현장에는 살해 도구와 증거도 남아 있었다. 누가 봐도 그가 범인으로 보인다.

하지만 애런은 살인을 부인한다. 자신은 단지 책을 반납하러 잠시 들렀을 뿐이고 범인은 다른 사람이라고 주장한다. 그의 변호를 맡은 인물은 유능한 변호사 마틴 베일이다. 그는 검사 출신으로, 유력 범죄자들의 변호를 통해 돈과 명성을 얻었다. 그가 애런처럼 돈 없는 청년의 무료 변론을 맡은 이유는 단 하나였다. 이 사건이 세간의 이목을 끌 수 있는 일종의 ‘쇼’였기 때문이다. 그는 법정을 진실의 무대가 아니라, 관객을 설득하는 무대로 여긴다.

 

고위층의 부패와 정치적 계산

마틴의 상대는 검사장 쇼너시의 지휘를 받는 검사 재닛 베너블이고 그녀는 마틴의 옛 연인이기도 하다. 수사를 진행하며 마틴은 러시먼 대주교와 쇼너시 검사장 사이의 유착관계를 의심하게 된다. 쇼너시는 성당 소유의 택지를 개발하려다 대주교의 갑작스러운 사업 중단 결정으로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그는 대주교의 성학대 스캔들을 묵인한 전력도 있으며, 이번 사건을 이용해 정치적 명성을 쌓고 시장에 출마하려는 뜻을 품고 있다.

 

하지만 영화는 쇼너시가 직접적인 살인범이라는 증거를 제시하지 않는다. 그는 단지 대주교 살해 사건을 정치적으로 활용하는 이들 중 하나일 뿐이다. 이러한 설정은 현실에서도 종종 제기되는 성직자와 권력층의 유착과 부패를 은근히 암시하며, 극적 긴장감을 조성하는 장치로 기능한다.

 

변호사 마틴과 살해 용의자 애런 / 넷플릭스

 

해리성 정체 장애와 '로이'의 반전

이 영화의 핵심은 애런이 단순한 피의자가 아닌 해리성 정체 장애(DID)를 가진 인물로 보인다는 데 있다. 평소에는 말더듬는 내성적인 청년이지만, 특정한 심리적 자극이 가해지면 돌변해 폭력적 인격 ‘로이’로 전환된다. 전문가들은 그가 어린 시절 가정폭력과 성적 학대의 피해자였으며, 성당 내에서 다른 복사들과 함께 러시먼 대주교에게도 학대를 당했다고 진단한다.

 

변호사 마틴은 이 점을 이용해 애런의 무죄를 주장하고, 배심원과 판사는 그의 정신질환을 인정하게 된다. 애런이 돌연 법정 난동 사건을 벌인 뒤 모두 사실은 그가 성적 학대 피해자이며 정신환자라고 믿기 시작한다. 그러나 영화의 마지막은 모든 것을 뒤엎는다. 면회실에서 마틴과 대면한 애런은 갑자기 말더듬기를 멈추고, 조롱하듯 이렇게 말한다.

 

“로이는 진짜야. 애런이 없었어. 그냥 만든 거야.”

 

그는 내내 ‘해리성 정체 장애’를 완벽히 연기한 것이었고, 마틴은 물론 전문가들까지 속아 넘어간 것이다.
결국 이 영화는 '진실'이라 믿었던 모든 것이 철저한 허구였음을 드러내며, 관객의 신념마저 무너뜨린다.

 

검사 재닛 베너블(로라 리니)이 비디오 테이프에 대해 추궁하는 장면 / 넷플릭스

 

해리성 정체 장애의 대표 사례: 빌리 밀리건 사건

해리성 정체 장애가 처음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사례는 미국의 빌리 밀리건 사건이다. 그는 1977년 여러 강간 혐의로 기소되었다. 하지만 정신과 의사들은 그에게 24개의 서로 다른 인격이 존재한다고 진단했다. 법원은 이를 인정해 그를 정신병원에 수용하였고, 빌리 밀리건은 미국 사법사에서 해리성 장애로 무죄 판결을 받은 첫 사례가 되었다.

 

하지만 이후 밀리건의 진단은 많은 논란을 낳았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빌리 밀리건의 24개의 얼굴들》은 이러한 의문점을 집중적으로 다룬다. 해리성 장애는 오늘날까지도 그 진위 여부를 둘러싼 논쟁이 계속 이어지는 중이다.

 

믿음의 진실과 조작, 망상

결국 영화《프라이멀 피어》는 이렇게 말한다. 


"법정의 진실은 배심원이 믿는 이야기일 뿐이며, 그 이야기조차 조작될 수 있다."

 

마틴이 초반에 말한 대사는 단순한 냉소가 아니었다. 자신이 그 누구보다 철저히 속게 될 것임을 암시하는 일종의 자기 예언이었다. 진실을 찾고 있다고 믿는 순간, 우리는 이미 누군가가 짜놓은 서사의 관객이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배우 에드워드 노튼은 이 작품에서 단 한 편으로 ‘순수함’과 ‘악마성’을 오가는 인물의 이중성을 완벽히 연기해내며 충격을 안겼다. 그 연기마저도 영화의 주제와 잘 맞닿아 있다. 사실 인간이란 누구나 내면에 여러 얼굴을 지닌 존재이고 필요할 때 그 가면을 갈아 끼우는 능력을 갖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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