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헌법을 읽자!
* 지난 2015년에 제 블로그에 쓴 글입니다.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유효한 글이라는 생각에 공유합니다.
베네수엘라처럼 ‘헌법의 생활화’가 필요하다
‘녹색평론'(2015년 9-10월) 첫 꼭지에 실린 김종철 선생의 글에서 감동스러운 대목이 있어 인용합니다. 베네수엘라 전 대통령 차베스가 집권한 뒤 곧바로 추진해 제정한 새 헌법 이야기입니다.
“그가 베네수엘라 국민, 특히 가난한 사람들이 고전문학을 즐기고, 헌법을 매일 읽을 것을 권장한 것은 그들이 존엄한 인간으로 다시 일어서는 데 그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겠죠. 그래서 일상적으로 헌법을 가까이하게 된 베네수엘라의 가난한 아줌마, 아저씨들이 지금은 가령 관공서 같은 데서 공무원이 뭔가 미심쩍은 말이나 행동을 하면 헌법책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뭐라고 쓰여 있는지 보라고.”
차베스 정부가 들어서기 전 베네수엘라는 빈부격차가 극심하였고 문맹률도 매우 높았다고 합니다. 보수대연합(1958년)으로 두 개의 보수당이 오랜 세월 권력 나눠먹기를 한 결과였습니다. 차베스 정부는 베네수엘라의 낡은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바꾸고자 ‘볼리바르 헌법’이라 불리는 민주적 헌법을 제정하고 대대적인 문맹퇴치 사업을 벌였습니다. 새 헌법은 전업 주부의 가사노동을 세계 최초로 공식 인정하고 그들에게 임금 지급과 연금 혜택을 주도록 명시한 사례로 유명하듯 가장 민주적이고 혁신적이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차베스가 추진한 ‘헌법의 생활화’는 베네수엘라뿐 아니라 지금의 한국에서도 꼭 필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한평생 헌법 한 번 읽어보지 않은 국민이 수두룩합니다. 헌법이 있지만 헌법이 제 기능을 잘 발휘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사실 대한민국헌법은 A4 10pt로 불과 17쪽 분량 밖에 되지 않습니다. 맘먹고 읽자면 천천히 읽어도 한두 시간이면 다 읽을 수 있습니다. 또 중졸 이상이면 너끈히 이해할만한 단어들로 쓰여 있습니다. 문맹률 낮기로 세계에서 선두를 다투는 이 나라 국민들이 '헌법 문맹'이라는 사실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고 국가적인 큰 손실입니다.
헌법재판소를 설치해 헌법소원 제도를 시행한지도 벌써 30년이 다 되어 갑니다. 하지만 헌법과 일반 국민의 거리는 너무 멀게만 보입니다. 정치권에서 ‘개헌’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간간이 들리지만 그건 마치 그들에게나 해당되는 딴 세상 이야기처럼 여겨지는 분위기입니다. 국민들이 헌법을 잘 모르니 헌법재판소가 진보당을 해산해도, 대통령이 사오정마냥 소통을 거부하고 일방 독주해도, 대법관들이 시민들이 제기한 선거무효소송 재판을 3년 가까이 뭉개도, 공영방송이 정권의 앵무새로 전락해도, 국정원이 선거에 개입하고 해킹으로 민간인 사찰을 해도 다 그럴 수 있는 일처럼 어물쩍 넘어갑니다. 헌법 전문에 나오는 ‘3.1운동’과 ‘4.19 민주이념’ ‘계승’의 의미만 온 국민이 철저히 새겨도 이지경은 아닐 것입니다.
많은 번역서를 남긴 성서학자 허 혁은 말년에 헌법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습니다. 그는 구약성서에 십계명이, 신약성서 마태복음에 산상수훈이 있다면 현대 한국 국민에게는 헌법이 있다며 목회자들이 성서만이 아니라 헌법도 설교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헌법은 법률가들의 전문 영역이라는 편견을 버리고 헌법 조문을 연구하여 그 의미를 교인들과 공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의 헌법은 제왕적 대통령제를 떠받치고는 있으나 87년 6월 민주항쟁의 산물이라 나름 잘 되어 있는 편이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가령 제18조는 “모든 국민은 통신의 비밀을 침해받지 아니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온 국민이 이 조항만 확실히 알고 있어도 국정원과 경찰, 군사이버사 등에서 감히 민간인 도감청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직 헌법을 한 번도 읽어보지 않는 분들에게 꼭 부탁합니다. 돈 드는 일 아니니 법제처 사이트(http://www.law.go.kr/)에서 ‘대한민국 헌법’을 검색해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인쇄해서 천천히 읽으시면 더욱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