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평

[영화 '마더'] 기억은 위험하다

솔샘인 2021. 5. 23. 21:48

어머니[김혜자]가 아들 도준을 면회하는 장면

봉준호 감독의 영화 '마더'(2009)를 이제야 봤다. 내게 배우 김혜자는 무려 22년이나 이어진 MBC 드라마 '전원일기'의 그 '어머니'로 새겨진 인물이다. 아마 나만이 아닐 거다. 그 정도 김혜자는 '어머니' 이미지가 강하다. 마더의 주인공이 김혜자란 사실에 섣부른 편견을 가진 나는 오랫 동안 영화를 보지 않았다. 뒤늦게 보니 실수였다. 이 영화의 어머니 김혜자는 뜻밖의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영화 '마더'에 나오는 김혜자는 지진아 아들을 지키고자 몸부림치는 어머니다. 아들 도준은 이미 다 커서 성인이지만 여전히 개울가에 내놓은 아이처럼 아직 어머니의 각별한 보호가 필요한 상태다. 적어도 어머니는 그렇게 생각한다. 도준에게 가장 큰 장애는 '기억력'이다. 그는 마치 건망증 환자처럼 조금 전 자신이 한 일조차 까맣게 잊어버리곤 한다.

 

도준은 어째서 이 같은 장애를 얻게 되었을까? 영화는 도준이 다섯 살 무렵, 어머니가 아들 도준과 동반 자살을 시도하다 실패한 뒤 이 같은 증세가 나타났다고 알려준다. 무슨 사연인지는 모르겠지만 다섯 살 난 아들 하나를 키우며 평생 살자니 어머니는 도무지 살 용기가 나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 사건 이후, 도준은 기억 장애를 얻었다. 얼굴 잘생기고 겉보기엔 건강해 보이지만 그는 끊임없이 덜떨어진 행동을 한다.

 

도준은 그 어리숙한 지적 능력 때문에 친구에게 이용당하고 사람들에게 '바보'란 소릴 곧잘 듣곤 한다. 하지만 그는 당하고 살지만은 않는다. 어머니는 그에게 "너를 놀리는 자들을 가만두지 말라"고 거듭 가르쳤기 때문이다. 지적 장애를 지닌 아이가 거친 세상에서 그저 당하고만 살지 않게 하려는 어머니의 심정은 이해 간다. 하지만 아들에게 자기 보호 능력을 키워 주려던 어머니의 교육은 되레 아들을 '살인범'이란 수렁에 빠뜨린다.

 

어머니는 약재상을 하며 부업으로 불법 침술을 한다. 그는 '아들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건 가리지 않을 정도 아들에 대한 집착이 무척 강하다. 장애아를 키우는 이 땅의 많은 어머니가 '마더'를 보면 크게 공감할 것 같다. 아니, 굳이 장애아 아닌 외아들을 둔 어머니라도 하나밖에 없는 자신 아들을 애지중지 키우다 보면 아들에게 과도한 집착을 보일 사람은 적지 않을 것이다. 어머니는 "내 아들의 울타리는 나밖에 없다"는 심경으로 목숨 걸고 아들을 보호하려 힘쓴다.

 

어머니는 아들이 '살인범' 누명을 썼다고 확신한다. 근거는 "내가 하지 않았다"는 아들의 진술이 전부다. 그런데 아들은 살인사건이 일어났을 당시 상황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전날 술을 먹긴 하였으나 한숨 푹 잔 뒤였기에 그는 취한 상태는 아니었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자신이 무얼 보았고 어떻게 행동하였는지 전혀 기억에 없다. 도준의 기억력이 그만큼 나쁘긴 하지만 충격적인 살인사건 현장에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상할 정도 기억하지 못한다. 

 

도준의 이런 선택적 기억 습관은 그를 철창에 보낸 '살인사건'에서도 마찬가지로 작동한다. 어머니는 도준이 살인 누명을 썼다는 확신으로 사건 당일 그의 작은 기억까지 모두 떠올리게 하려 한다. 하지만 도준이 그 모든 사실을 기억해 낸다면 도준이 살인범이란 사실은 더욱 명백해질 판이다. 어머니는 아들을 구출한답시고 되레 아들을 더 궁지로 내모는 중인 거다.

 

도준은 엉뚱하게도 다섯 살 무렵 어머니가 자신과 동반 자살을 시도하려다 실패한 기억을 떠올린다. 오랜 세월 까맣게 잊고 살던 기억이다. 도준은 왜 뜬금없이 이 끔찍한 기억을 떠올렸을까? 사실 모든 사건의 뿌리가 거기에 있기 때문일 거다. 어머니와 아들은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으나 도준은 어머니가 어린 자신을 살해하려 하였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였다. 생존의 본능이 그 기억을 괄호 치기로 한 거 같다. 그러지 않았다면 그는 어머니를 정상적으로 대하며 살기 힘들었으리라. 

 

한편 살해당한 여고생 아장은 자신을 망가뜨린 자들 얼굴을 모두 휴대폰에 촬영해 놓았다. 휴대폰에 저장된 사진도 '위험한 기억'을 되살리는 장치이다. 그는 휴대폰을 팔아 자신의 불행한 모든 기억을 지우고 싶어 하면서도 그 안의 사진들은 현상하려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꼭 복수하고 싶었던 거 같다. 복수한다면 그 모든 기억을 깨끗이 지울 수 있을까? 마을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빈집 옥상에 빨래처럼 내걸린 아정의 시신은 그 마을에서 아정을 짓밟은 모든 자의 기억을 소환하는 깃발 같은 장치가 아닌가 싶다.

 

어머니는 아들을 구해 보고자 유력한 살인 용의자로 보이는 고물상 주인을 찾아가 그를 살해하기에 이른다. 이 살인사건도 그 용의자가 들려준 '그날의 기억' 때문에 발생한다. 그 기억이 세상에 알려지면 아들 도준의 살인 혐의는 더욱 뚜렷해지고 그의 무죄 석방은 기대하기 어려워진다. 어머니는 이 '위험한 기억'을 지우고자 살인을 저지르고 고물상 집마저 불태운다. 그는 마을 사람들과 함께 가는 관광버스 안에서 한동안 혼자 어울려 춤추지 못한다. 그러다가 자신이 아는 그 모든 불행한 기억을 지우고자 '기억을 지우는 혈 자리'에 침을 꽂고 사람들과 어울려 춤을 춘다.

 

어떤 기억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지만, 사람의 기억 중에는 떠올리면 상처와 폭발성이 커 너무 '위험한 기억들'도 있다. 어쩌면 대부분의 사람이 도준처럼 선택적 기억을 하기에 이나마 정상 생활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5.18 당시 계엄군으로 광주에 내려와 작전을 수행하던 군인들은 다들 어디서 어떻게 생활하고 있을까? 그들은 그 시기 자신이 무슨 일을 하였는지 낱낱이 떠올릴 수 있을까? 이 영화는 사람들이 지우고픈 자신의 '위험한 기억들'을 어떻게 저장하고 관리하는지를 보여주며 스스로를 돌아 보게 하는 작품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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